쓸모없는 말 (Nebezonata lingvo) / Tagiĝo

2018.03.05 13:15

Kulturcen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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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말 (Nebezonata lingvo)

 

 

도나 숙모에게 오늘은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자꾸 깨게 되고, 뒤척이고 이상하고도 무서운 꿈들을 꾸었는데, 그 꿈들은 바닥없는 수렁에 이끌린 듯 갑작스럽게 사라졌고, 도나 숙모에게는 단지 두려움과 불안함만 남아 있었다. 목은 바짝 마른 채로 침대에 떨면서 누웠다. 그리고 도나 숙모는 내일로 다가온 큰 모험을 치르기 위해 잠을 다시 청했다. 내일 진정 미국에 가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막혀 왔다.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비행기를 타고 수천 마일을 날아가고 모르는 나라들, 큰 바다도 건널 것이다. 도나 숙모는 굳게 다짐한다. ‘그래 가자. 인생 마지막 여행이 될지라도.’

 

도나 숙모는 오래전부터 꾹 참고 이 순간을 기다려 왔었다. 홀로 잠 못 이루는 밤마다 그녀는 여행에 대해 꿈꿔 왔다. 딸 레나와 사위 스테판 그리고 손자 드미트리를 만나는 그 순간 얼마나 기쁠까. 그녀는 그들을 따뜻하게 포옹하고 키스할 것이다. 드미트리는 벌써 다섯 살인데 숙모는 아직 한번 만나본 적이 없었다. 드미트리가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레나는 자주 숙모에게 사진을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기뻐서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손자를 껴안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아이의 작은 심장의 울림을 듣고 싶었다. 그녀는 정말 손자가 생기기를 바랐고 아이를 돌보며 함께 즐거워하고자 했다. 딸과 사위가 손자를 나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너무 멀리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도나 숙모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요즘 인생살이가 그렇다고 한다. 삶이 변했다. 세상이 아주 좁아진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싶은 어디든, 미국이나, 유럽 혹은 아시아에 가서도 살기 때문이다.

 

레나와 스테판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레나는 도나 숙모에게 말했다.

“엄마, 나랑 스테판이랑 미국에 가기고 결정했어. 거기서 우리 인생을 걸어 볼려구. 엄마도 알지 여기 생활이 어떤지. 나도 일이 없고 스테판도 일이 없어. 난 벌써 이년이나 됐잖아. 엄마 연금은 쥐꼬리만 하고. 그걸로는 엄마 혼자 살기도 빠듯해.”

 

“너희 진짜 그러려고?” 도나 숙모는 그렇게 물으면서 가슴이 슬픔으로 저렸다.

“그래 엄마.”

 

레나는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레나도 엄마에게 말 꺼내기가, 그리고 엄마의 슬픈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너희는 젊잖아. 우리나라의 상황이 바뀔 수도 있고. 만약 상황이 더 나아지면 너랑 스테판도 여기서 괜찮은 직장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리 멀리 가려는데?”

“엄마, 우리는 젊어. 여기서 계속 머물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엄마 연금을 계속 축낼 수는 없고. 우리도 이제 뭔가를 해야겠어. 우리 갈 길을 가야지.”

“그래. 너희들 이미 결정 한 거구나.”

 

도나 숙모는 고통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해하지 마, 엄마. 우리가 돈 부칠게. 그리고 조금 기다리면 우리가 엄말 모실게. 여기서 엄마 혼자 힘들 것은 알아. 하지만 계속 여기 있는 것은 느리지만 확실히 죽는 지름길이야.”

“난 혼자 살 수 있어.”

도나 숙모는 단호히 말했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나 늙었지만, 아직 그리 늙지 않았어. 아직 건강하니까 스스로 돌 볼 수 있지. 나한테 더 중요한 것은 너희가 그 먼 나라에서 잘 사는 거야. 행복해라. 네가 미국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엄마에게 가장 기쁜 것은 자식들이 잘 살고, 건강하고, 행복한 거야.”

 

스테판과 레나는 떠났고, 몇 주 후 도나 숙모는 편지를 받았다. 시카고에 이미 도착했고, 모든 게 순조롭다고 했다. 연이은 편지에는 직장도 잡았고, 잘 지낸다고 했다. 그러나 도나 숙모는 모든 일이 편지처럼 순조로운지 확실치 않았다. ‘정말 조국에서 멀리 떨어져서도 잘 살 수 있을까?’ 그러나 딸을 믿고 싶었다.

 

일 년 후 도착한 편지에는 레나가 임신을 했으며 조만간 출산 예정이라고 적혀있었다. 부부는 십여 년 전 돌아가신 레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를 드미트리로 부르기로 했다고 했다. 도나 숙모가 그 편지를 읽었을 때 기쁨으로 날 듯이 즐거웠다. 혼잣말로 ‘드디어 나에게도 손자가 생기는구나. 레나와 스테판이 건강하게 잘 살고, 신이 보호하시기를.’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그녀는 손자를 꿈꿔왔었고, 지금 레나와 스테판이 아이를 가진 것이었다.

 

레나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아이를 낳았으나, 도나 숙모는 너무 멀리 있기에 아이를 보지 못했다. 미국 식구들 곁에 머물고 싶기에 레나의 비행기 표를 기다렸으나 항상 무슨 일이 생겨 비행기 표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드미트리는 이미 많이 자라 다섯 살이 되었다. 도나 숙모는 곧 아이를 보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희망을 잃게 되었다. ‘아, 드미트리를 생전 못 보겠구나. 난 뜬 눈으로 죽겠지만 신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시겠지. 계속 건강히 살길 빈다. 난 이제 얼마 못 버텨.’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레나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비행기 표를 보냈으며, 도나 숙모가 미국에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도나 숙모의 가슴은 새처럼 하늘을 날 듯 다시 기쁨으로 철렁였다. 그녀의 얼굴은 맑아졌고, 피로한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드디어 미국에 가서 레나, 스테판 그리고 드미트리를 보는구나. 가장 소중한 것은 드미트리였다. 얼마나 귀한 손자인가! 딸, 사위, 손자 식구와 멀리 떨어져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낸 할머니에게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도나 숙모는 먼 여행 준비를 시작하였다. 먼저 레나와 스테판에게 줄 선물을 샀다. 손자를 위해 알록달록 그림이 있는 예쁜 동화책을 샀다.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바로 날아가서 드미트리를 보고, 옆에 앉아 아이에게 예쁘고 재미있는 불가리아의 동화를 읽어주고 싶었다. 읽을 뿐만 아니라 들려주고 싶었다. 할머니에게는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커다란 기쁨인 법이다. 아이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쫑긋 듣고 모든 단어 단어 하나를 마른 땅이 봄비를 빨아들이듯 받아들일 것이다.

 

여행을 위해 도나 숙모는 새 외투와 구두를 샀다. 머리도 했다. 오랫동안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새 옷도 입고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그녀는 넓디넓은 땅을 건너 수천 킬로를 여행할 것이다. 신세계에 가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날 것이다.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도나 숙모는 교양있고 지적인 여자였다. 30년 가깝게 불가리아어와 문학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그녀를 사랑했고 존경했다. 예전에는 작가로서 비평도 하고, 칼럼도 쓰고 심포지엄과 콘퍼런스도 참가했었다. 그러나 은퇴 후 활기를 잃었고 레나와 스테판이 떠나자 먼 해안에 잊힌 채 녹슬어가는 배처럼 그녀의 인생도 그리 늙어갔다.

 

떠나는 날 아침 도나 숙모는 너무 일찍 일어났다. 간밤 거의 잠을 못 잔 것이다. 그녀는 옷을 입고 여행 채비를 하였다. 조카 드라고가 차로 와서 공항까지 태워주었다. 여동생 밀라와 두 명의 사촌 그리고 스테판의 부모가 배웅을 나왔다. 모두가 그녀와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며 좋은 여행을 빌었다. 도나 숙모는 멀고 먼 여행길을 생각하니 불안해졌다. 프라하에서 하루를 머물다가 다른 비행기로 환승 후 미국으로 향할 예정이다. 다행히 프라하행 비행기에서 한 여의사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 역시 시카고로 가고 있었다. 비행 중 그들은 긴 대화를 나누었고, 프라하에서 함께 시카고로 여행을 하였다.

 

시카고 공항에서 레나, 스테판 그리고 손자 드미트리가 도나 숙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감에 반짝였다. 지금만큼 인생에서 더 행복한 적이 없었다. 식구들과 키스하고 포옹하고, 특히 처음 보는 드미트리를 꼭 끌어안았다. 손자는 좀 말랐지만 활발해 보였다.

 

“아이고, 하나밖에 없는 내 손주”

도나 숙모는 기뻤다.

“이름이 뭔지 할미에게 말해다오. 봐 할미가 불가리아에서 뭘 사 왔는지. 아주 재미있는 동화책이야. 우리 함께 읽자. 할미가 나중에 옛날이야기도 해 줄게.”

 

도나 숙모는 드미트리에게 그림 동화책을 주었다. 그런데 아이는 계속 조용했고 단지 큰 두 눈으로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아이가 겁이 많구나. 아마 나를 처음 봐서 그렇겠지’ 도나 숙모는 그리 생각하고 계속해서 다정히 말을 걸었다. 몇 분 후 도나 숙모는 레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얘야, 드미트리가 말을 할 수 있니? 아이가 왜 이리 조용하지?”

“엄마, 얘 말 잘해. 근데 엄마를 이해 못 한 거야. 엄마가 불가리아 말로 했잖아”

“뭐? 불가리아 말을 할 줄 몰라?”

“그 애는 영어만 해.”레나가 대답했다.

“우리는 그 애랑 영어로 말하거든.”

“정말 영어만 하는 거야?” 도나 숙모가 놀라서 말했다.

“불가리아 말은 한마디도 못 하는 거야?”

“불가리아 말은 모르지.”

“왜 그런 거야, 난 믿을 수가 없다.”

도나 숙모는 놀랐을 뿐만 아니라 화가 났다.

 

“어떻게 애를 그렇게 놔두었어? 넌 불가리아 사람인데!” 화나서 말했다.

“엄마” 레나가 도나 숙모를 봤다.

“드미트리가 왜 불가리아어를 알아야 하는데? 얘는 미국 아이라고. 여기서 태어났잖아. 무엇 때문에 불가리아 말이 필요한데? 얘는 평생 불가리아에서 안 살 텐데. 얘는 여기서 산다고. 엄마도 알잖아. 지금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모두 다른 나라로 떠나서 일자리를 찾잖아.”

“레나야 무슨 말을 하고 있어. 우리는 불가리아 사람이야. 우리는 거기서 태어났어. 불가리아가 조국이란 말이야.”

“엄마, 그건 옳지 않아. 엄마 같은 학교 선생님만 하는 말이라고.”

 

도나 숙모는 할 말을 잊었다. 다만 이제 쓸모가 없는 불가리아 동화책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크고 말 없는 드미트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도나 숙모는 아직도 아이가 불가리아 말은 한마디도 못 한다는 것, 그리고 마치 넓디넓은 바다가 그들을 갈라놓아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손자와 앞으로 결코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소피아에서, 2012년 10월

 

<끝>

정 회 정/2018년 5월 17일/010-9014-6379/eb5advis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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