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페란토 인터뷰 기사
Iama intervjuo kun jhurnalo

평등의 언어를 보급하는 에스페란토문화원장 이중기
“특정민족어는 세계공통어가 될 수 없다”

 

[인터뷰365 김우성] 인권에 관한 옴니버스영화 <여섯 개의 시선>(2003) 중 한 토막에서는 영어발음 교정을 목적으로 아이를 수술대 위에 올리는 한국사회의 광기를 다루고 있다. 혀의 구조를 서양인과 비슷하게 만든답시고 아이의 입 속에 메스를 들이대는 충격적 장면은 극히 일부의 사례에 해당되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영어식민지’라 해도 이견이 없을 만큼 영어맹신주의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 이중기 원장은 이같은 현상에 대해 해법 하나를 제시한다. 알파벳만 알면 누구나 쉽게 습득이 가능한 ‘에스페란토’를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다. 에스페란토는 어떠한 사용자에게도 언어적 우위를 두지 않는 평등ㆍ평화주의에 입각해, 유대계 폴란드인 안과의사 자멘호프가 창안한 세계공통어다. 현재까지 고안된 세계공통어 중 가장 많은 인구가 사용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거론되기도 했다.

지난 1991년 설립된 서울 에스페란토 문화원(www.esperanto.co.kr)은 대학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에스페란토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이중기 원장이 자비로 문화원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에스페란토 보급하고 있다. 그는 세간의 무관심 속에서도 묵묵히 2백 기수가 넘는 수강생을 배출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 아시아 위원장이라는 중책까지 맡게 됐다.

서울 명동에 자리잡은 에스페란토 문화원을 찾아 이 원장의 에스페란토에 관한 열변을 들어봤다.

지금 수강생들이 몇 기수죠?

205기가 배우고 있습니다. 다음달에는 206기가 들어오지요. 일주일에 세 시간씩 4주에 걸쳐서 교육을 하는데요. 에스페란토는 12시간의 교육만으로 외국인과 대화가 가능합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학생들이 에스페란토 한 달 배워서 외국인과 인터뷰하는 과제 영상물을 만들었어요.

수강생들에게 교재비만 받으며 문화원 강의를 사실상 무료로 진행해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재정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유지가 어렵습니다. 공간이 있어야 하고 강사가 있어야 하니까요. 홍보도 이루어져야 하고요. 다행히 아내가 병원에서 일을 해요. 자비로 운영해 올수 있었던 데는 아내의 공이 큽니다. 에스페란토에 관한 한 세계 어디에서도 우리와 같은 사례가 없었어요. 2백 기수 넘도록 20여 년에 걸쳐 꾸준히 수강생을 배출해 온 것 말이죠. 어느 곳의 지원도 없이 끌고 온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경이로운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단 한 번도 강의를 중단하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는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에스페란토를 처음 접한 게 언제였나요?

대학교 1학년 때인 1971년 에스페란토 동아리를 통해 배우게 됐습니다. 직장생활 하면서 에스페란토와의 연을 놓지 않고 있다가 직접 에스페란토 문화원을 설립하게 된 것이죠.

흔히 에스페란토를 ‘평등의 언어’라고 하는데요.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민족어는 결코 세계공통어가 될 수 없습니다. 국가적인 계약을 영어로 진행했을 시 후에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가 항상 지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영어가 민족어인 사람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죠. 그들이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맞다”라고 한다면 할 말 있습니까. 그 자체가 불평등하다는 거죠. 우리는 지금 자라나는 미국의 어린이들을 위해 영어를 배우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영어권 국가들의 국력 때문에 영어가 쓰이고 있을 뿐이지요. 역으로 말해 지금은 당연한 듯 통용되는 영어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중립적 언어를 쓰자는 ‘1민족 2언어’ 주의가 우리의 주장이지요.

우리가 영어를 ‘네이티브 스피커’ 수준으로 구사한다 해도 상대방이 우리를 동등한 시선으로 대할지도 의구심이 듭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 배워봤자 민족어로 쓰는 국민들 앞에서는 영원한 2등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박경리의 <토지>를 읽기에 앞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모르면 작품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진주ㆍ하동지역 방언에 담긴 고유의 정서도 알아야 할 것이고요. 한국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서양 사람들은 어떨까요.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평생을 노력해야 할 겁니다. 한국인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죠. 영어를 배우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영어도 하나의 민족어로 존중은 하되, 국제공통어는 평등한 별도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영어가 워낙 오랫동안 세계에서 통용되어왔던 터라 근본환경이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세계 언어현실이 영어에 도전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UN에서도 언어문제 만큼은 언급을 금기시합니다. 섣불리 건드리기에는 이해관계가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거죠. 하지만 UN에서 근무하는 에스페란티스토들은 “법조문과 공적 결의문에 있어 에스페란토만큼 합리적인 게 없다”고 말합니다. 특정 민족어는 고유의 민족적 표현을 피할 수 없어 세계적 합의안에 적합하지 않다는 거죠. 또 한 가지 현재 EU 공용어가 24개인데요. EU가 태동할 때 모든 회원국의 언어를 인정한다고 했던 것이 지금에 이르러 통역예산만 무려 8억 유로에 달합니다. 이에 따라 최근 여론조사에서 EU 언어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에스페란토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EU가 에스페란토를 공통어로 채택한다면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겠습니다.

EU 화폐 통합안을 마련한 사람들이 에스페란티스토였는데요. 애당초 화폐통합과 언어통합을 함께 주장했는데 모두들 화폐통합에는 긍정했지만 언어통합에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세계공통어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죠. 조금씩 가시적인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독일 헤르즈베르그는 시당국에서 “우리 도시는 에스페란토 도시다”라고 공식선언하고 지난해 여름 모든 안내표지를 에스페란토로 바꾸었습니다.

세계 금융계의 큰손 조지 소로스가 에스페란토로 인해 인생이 달라졌다는 일화가 전해지던데요.

그가 청년이던 당시 조국 헝가리는 엄격한 공산체제여서 국외여행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에게는 허가를 쉽게 해주는 편이었지요. 소로스 역시 스위스에서 열리는 대회 참가를 목적으로 출국했다가 영국으로 망명한 것입니다. 에스페란토로 ‘소리’는 ‘비상하다’, ‘오스’는 ‘미래’를 뜻해요.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에스페란티스토거든요. 아들을 떠나보내면서 ‘지금은 고생하지만 새처럼 날아올라라’는 의미로 성을 바꿔준 것이지요.

올해 큰 행사가 있다죠?

2009년은 에스페란토의 창시자 자멘호프 박사가 탄생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의 고향인 폴란드 비알리스토크에서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는데요. 5천에서 6천 명 정도가 한 자리에 모여 통역 없는 국제회의를 가질 예정입니다. 각국에서 날아온 에스페란티스토들이 1주일간 연극 합창 웅변 등 문화행사를 열고, 의료 화학 언론 등 각 전문분야별 모임을 따로 갖습니다.

에스페란티스토끼리 무료로 민박 제공도 한다면서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책자에는 각 도시별 민박 정보가 가득합니다. 금연자에 한 하거나, 침낭을 가져올 것, 1주일 이내에 한하는 등의 상세조건이 기록되어 있지요. 출발하기 전 미리 연락하면 공항에 나와서 반겨주고, 어디든 가는 곳마다 에스페란티스토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세계가 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안전하고요.

일반인들이 어느 정도 익히면 회화가 수월해질까요?

단국대학교에서 초급과정을 배운 학생이 3개월 간 해외에서 에스페란티스토와 생활하다가 온 적이 있어요. 돌아와서는 놀랄 만큼 유창하게 에스페란토를 사용하게 됐지요. 하루에 1시간씩 한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기서 초급을 마치고 현지에 가서 3개월 정도만 익히면 전혀 어려움 없이 대화가 가능해질 겁니다.

물론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장기간 어학연수에도 좀처럼 자신감을 얻기 힘든 영어에 비해 굉장히 경제적이라 할 수 있군요.

에스페란토는 ‘자연어’인 민족어와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자연어는 말이 먼저 생겨나고 이후에 문법이 생겨난 겁니다. 반면 에스페란토는 일정한 원칙에 의거해 문법이 먼저 생겨났죠. 자연어가 어렵다는 건 예외성과 불규칙성에 있습니다. 에스페란토는 언어의 구구단이라 할 수 있어요. 구구단을 배워야만 인수분해라든지 미적분을 배울 수 있잖아요. 언어의 기본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에스페란토만한 게 없습니다. 에스페란토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어요. A그룹에게는 1년간 에스페란토를 나머지 1년간 불어를 가르쳤고, B그룹은 2년 내내 불어만 가르쳤어요. 2년 후 두 그룹의 어학능력을 검증해보니 에스페란토를 먼저 배운 A그룹이 오히려 불어를 더 유창하게 했지요.

앞서 잠깐의 강의만 듣고도 성별, 연령, 학력을 막론하고 누구나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존 언어교육의 문제는 용어 자체가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부정사’라고 하면 바로 알아듣나요. 한자로 ‘부정’이라는 뜻이 한 두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분사, 관계대명사 등등은 또 어떻습니까. 이게 다 한자를 사용하는 일본에서 온 용어들인데, 용어 자체가 헷갈리니까 학생들이 힘들어하는 거예요. 에스페란토는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 구조에 대해 금방 깨우칠 수 있어서 초등학생도 쉽게 배워요. 영어공부를 안 하려던 아이들이 에스페란토를 배운 후 언어에 흥미를 갖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다른 언어도 배워 더 많은 외국인과 대화하고 싶어 하더라는 겁니다.

에스페란토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앞으로 관건은 무엇인가요.

에스페란토 인구가 많아져야 합니다. 큰 배가 뜨려면 바다가 깊어야 하지 않습니까. 에스페란티스토가 늘어나면 날수록, 에스페란토의 진가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누군가 씨를 뿌려야 합니다. 현재까지 국내에서는 문화원에서만 약 1500 여명의 에스페란티스토가 배출됐어요. 대학까지 포함하면 수만 명이고요.

국내 대학에 에스페란토 전공도 있나요?

한국외대 단국대 원광대에 교양과목으로만 개설되어 있습니다. 세 학교를 따져보면 대학에서만 1년에 총 6백여 명의 에스페란티스토가 생겨납니다.

대학에서 강의도 하시지요?

한국외대 강의는 작년까지 했고, 지금은 단국대와 원광대에서 하고 있습니다. 문화원 초중급 수업까지 하면 1주일 내내 강의를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에는 일본에 다녀왔고, 올해도 4월에 라오스, 6월에 몽골, 7월에 폴란드, 10월에 상하이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처음 에스페란토를 접하고 40 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장 보람 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청출어람’이라고 하죠. 뛰어난 제자들을 봤을 때입니다. 에스페란토를 배웠던 어떤 학생은 세계 에스페란토 청년회 임원으로 활동하며 세계를 무대로 강연과 웅변을 하고 다닙니다. 민간외교관으로서 한국 젊은이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이죠.

아쉬운 점도 많았을 테지요.

에스페란토를 배웠던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건데요.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생계에 직면하다 보면 급하고 덜 급한 일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에스페란토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간직하고 있으면 언제라도 다시 올 거라 확신합니다. 13년 전 저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웠던 대학생이 작년 6월에 전화가 왔어요. 지금 대학교수가 되어 있었는데 다시 에스페란토를 배워보고 싶다는 겁니다. 후에 중국에 같이 갈일이 있었는데 무척 잘하더라고요. 오래전 씨를 뿌리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겁니다. 에스페란토의 말뜻이 ‘희망하는 사람’입니다.(웃음)

정부 지원이 절실해 보이는데요.

옛 재정경제원 고위직 공무원이 에스페란토를 배우고는 “국가차원에서 도와줄 일을 고군분투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위로를 하더라고요. 그 공무원은 12시간의 초급 과정만 배우고도 저에게 이렇게 장문의 에스페란토 편지를 (실제로 편지를 보여주며) 보내 왔습니다.

앞으로 에스페란토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메신저를 통해 전세계인들과 실시간 대화를 나누는 시대입니다. 돈이 전혀 안 들어요. 이런 훌륭한 도구를 놓고도 프랑스인 독일인 스페인인들과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나요. 언어장벽 때문에 활용을 못하고 있잖아요. 에스페란티스토는 가능합니다. 인터넷이 에스페란토 보급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에스페란토는 철자 따로 발음 따로 외워야하는 영어에 비해 큰 수고 하나를 덜어낸다. 보이는 그대로 발음하는, ‘한 글자 한 소리’ 원칙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뜻하는 에스페란토 ‘patro’는 ‘파트로’로, 어머니를 뜻하는 ‘patrino’는 ‘파트리노’로 읽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모든 명사는 ‘o’로 끝나며 여성의 경우 마지막 모음 앞에 ‘in’을 붙이는 규칙이다. 따라서 ‘아들’을 뜻하는 ‘filo(필로)’에 ‘in’을 붙이면 ‘딸’을 뜻하는 ‘filino(필리노)’가 된다. 모든 단어의 반대말은 앞에 ‘mal’을 붙이면 해결된다. ‘alta(알타)’는 ‘높다’를, ‘malalta(말알타)’는 ‘낮다’를 의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명사가 ‘o’로 끝난다면 형용사는 ‘a’로, 부사는 ‘e’로 끝난다. ‘친구’라는 뜻의 ‘amiko(아미코)’에 이를 적용하면 ‘다정한’은 ‘amika(아미카)’, ‘다정하게’는 ‘amike(아미케)’가 된다. 물론 ‘malamiko(말아미코)’는 ‘원수’의 의미를 지닌다. 이렇듯 한 단어를 알면 자동으로 수십 개의 단어를 습득하는 것이 에스페란토의 기본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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